발주처ㆍ인허기가관들 여전히
두툼한 종이 준공도서 원해
결국 ‘설계는 3D, 납품은 2D’
이중작업에 BIM 기피증 키워
중대재해처벌법 뉴노멀 시대
가상공간 위험요인 사전파악
BIM 중심 제도 재설계 시급
[e대한경제=김태형 기자] 최근 일본 오사카의 코로나19 확진자 1만2700여명이 누락되는 일이 발생했다. 원인은 일본 특유의 ‘팩스 문화’ 때문이다.
일본은 코로나 확산 초기에도 팩스 위주의 후진적인 통계 집계 방식으로 골머리를 앓았다. 인구 2000만명이 넘는 수도 도쿄마저 팩스 두 대로 확진자 수를 집계하다 과부하에 걸렸다. 백신 패스 도입 과정에선 일부 지자체들이 수작업을 고집하다 10만명분의 접종 기록을 잘못 입력해 혼란을 겪기도 했다.
우리나라도 일본의 팩스 문화를 비웃을 처지가 못 된다. 건설산업의 디지털 전환을 위한 핵심 플랫폼인 BIM(건설정보모델링)이 기존 2차원(2D) 도면 위주의 인허가 시스템과 입찰 관행에 막혀 질주를 멈췄다는 점에서다.
문현석 한국건설기술연구원 BIM클러스터장은 “BIM 도입 15년이 지났지만 전문가들이 평가한 국내 BIM 성숙도는 전체 4단계(도입기∼지능화) 가운데 초기 도입기인 ‘레벨1’에 수년째 머물러 있다”고 진단했다.
조달청이 2009년 발주한 용인시민체육공원 턴키(설계ㆍ시공 일괄입찰) 사업에 BIM 활용을 입찰지침에 포함시키면서 ‘공공 BIM 1호’가 탄생한 지도 벌써 13년이 지났다. 주무부처인 국토교통부와 공공 발주기관들이 ‘BIM 의무화’를 앞다퉈 추진하고, ‘BIM 활성화’를 위해 민간기업들을 떠미는데도 BIM이 좀체 확산되지 않는 이유는 뭘까.
이에 대해 한국BIM학회장을 지낸 심창수 중앙대 사회기반시스템공학부 교수는 “발주처와 인허가 기관들이 여전히 두툼한 종이뭉치의 준공도서를 원한다”면서, “BIM 활성화를 외치지만 정작 디지털 도면은 법적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꼬집었다.
BIM은 시설물의 3차원(3D) 모델과 함께 자재, 공정, 공사비 등 다양한 건설정보를 담고 있다. 궁극적으로 건설 전 과정의 정보를 통합 생산ㆍ관리ㆍ활용하는 기술이다.
하지만, 현실에선 설계는 3D BIM으로 하고, 납품은 2D CAD로 제출하는 ‘설계 따로, 납품 따로’의 부조리한 시스템이 지속되고 있다. 여기에 설계는 2D로 하고, 전문업체에 BIM 구축을 떠넘기는 ‘전환설계’도 여전하다.
건설엔지니어링기업 A사 관계자는 “BIM 소프트웨어로 모델을 구축한 후 2D CAD로 도면을 따로 작업하는데, 도면화를 위한 세팅이 너무 번거롭고 시간이 오래 걸려서 이중, 삼중 부담으로 작용한다”며, “BIM 전면설계를 하기엔 시간, 비용, 인력 모두 턱없이 부족하다”고 토로했다.
이 같은 이중작업 방식은 필연적으로 도면과 BIM 데이터의 불일치 문제를 촉발한다. 시공단계에서 쓸 수 없는 BIM 데이터를 양산하고, 건설현장의 BIM 기피증을 키우기 마련이다. 실제 국내 최대 공공발주기관인 한국토지주택공사(LH)의 경우 3기 신도시 기본설계에 BIM을 전면 적용하려던 계획을 현장 활용성 문제로 잠정 보류했다.
‘스토리텔링 BIM’의 저자 진상윤 성균관대 건설환경공학부(건축공학트랙) 교수는 “기존 2D 기반 설계 프로세스의 가장 큰 문제점은 설계도서 오류”라고 지적한 뒤, “중대재해처벌법이라는 뉴노멀 시대에는 가상공간에서 미리 위험요소를 파악해 현장 안전사고를 막을 수 있는 BIM 설계기간을 충분히 확보해줘야 한다. 무엇보다 2D 도면 중심의 성과물 관점에서 BIM 중심으로 제도를 전면 재설계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근본적인 패러다임 변화를 이끌어가려면 재정당국을 포함해 범부처 간 컨센서스(합의)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나온다. 심창수 교수는 “디지털 전환을 백날 외치면 뭐하나. 감사를 받으려면 무조건 문서(2D 도면)부터 요구한다. BIM 활성화를 위해선 앞단(설계ㆍ엔지니어링)으로 집중되는 업무량에 맞춰 사업비도 재구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태형기자 kth@d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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